한영조/제주숲치유연구센터 대표/산림치유지도사
77. 식물치유(9)

해안·저지대는 경작지와 억새군락이 지배한다

식물의 생활상은 넓은 영역에서나 좁은 영역에서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는 치열한 삶의 공간 쟁탈전을 벌인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해안지대에서는 그 환경에 맞는 식물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저지대, 중산간지대, 저고산지대, 고산지대, 극고산지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식물이 살아가는 삶을 해발고도 100m 단위로 잘게 쪼갠 후 그곳에서의 식물 생활상은 어떤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게 영역을 좁힌 후 식물의 생활상을 드려다 보면 자기들끼리 뺏고 빼앗기는 영토전쟁의 생생한 모습들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도가 100m 높아질수록 기온은 0.6낮아진다. 바람과 추위가 심해진다. 이렇게 변해가는 환경에서 어떤 식물이 지배권을 쟁취해 주위를 호령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이전 우점종 군락은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몰락하고 새로운 우점종이 영역을 확장하면서 지배권을 틀어쥔다. 이와 함께 우점종인 군주와 구성 종인 백성으로 나눠진 집단이 형성된다. 백성으로도 자리 잡지 못한 식물들은 서서히 도태돼 사라진다. 집단과 집단 사이 경계지역에는 서로 영토확장을 위한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를 볼 때 식물의 세계에서도 영원한 강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점종은 경쟁하는 식물들을 물리치고 넓은 영토를 점령해 나간다. 나름대로 튼튼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더욱 확장해 나간다.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지배력이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틈새를 노리는 무수한 적들이 끊임없이 공격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순간 방심하는 사이 획득한 영토마저 뺏길 수 있다. 경계와 전투와 방어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냉엄한 식물 투쟁의 현장이 들판이고 숲이다.

 

임양재 등은 33년 전인 1991년 제주 17개 식물군락의 투쟁 현장을 조사한 바 있다. 해발고도 0m 해안에서부터 1950m 백록담 정상까지 100m 단위별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식물군락을 순위별로 조사했다(도표 참조). 여기에는 사람들의 간섭에 의한 토지이용과 산림의 분포면적도 포함된다.

 

3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이 자료를 인용하는 것은 그동안 자연적으로나 인위적으로나 제주의 식물에 미치는 대규모적인 사건 등 물리적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가 있다면 식물끼리 벌어지는 생존 투쟁 정도다. 그래서 식생에 안정적인 흐름이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오래전에 조사한 자료임에도 현재에 와서도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조사자료는 해발고도 100m 단위별로 17개 식물군락을 대상으로 일정한 면적의 범위로 한정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에 포함되지 않는 수많은 식물의 면적이 훨씬 더 넓고 많을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 자료는 한정적인 범위일지라도 치열하게 벌어진 생존경쟁의 식물상을 해발고도별로 그려지고 있기에 주목된다.

 

한편으로는 식물의 세계를 지나치게 투쟁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서로 협력하는 생활상 등 식물의 다양한 삶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열거하면서 풀어내는 것은 복잡함과 일관성이 떨어질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식물치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그렇다. 투쟁이 있으면 아픈 곳이 있게 마련이고 그 아픈 곳이 아물 수 있도록 치유가 동반된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생활상 중에서 식물의 투쟁사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인용한 자료는 1991년 임양재 등이 조사한 한라산의 식생자료다. <199117개 식물군락의 100m 고도별 분포면적>을 보면 대표적인 군락 중에 저지대 수종으로는 경작지를 비롯해 초지, 억새, 곰솔 및 식재림 등을 들고 있다. 중산간지대에서는 상록활엽수나 혼합림 등이다. 저고산지대에서는 소나무, 제주조릿대, 졸참나무,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물참나무 등 낙엽활엽수 등이다. 고산지대와 극고산지대에서는 구상나무, 산철쭉, 털진달래, 눈향나무, 시로미 등이다. 이들 17개 군락을 전체로 볼 때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군락은 경작지군락이다. 두 번째는 건성초지·억새군락이다. 세 번째는 곰솔·식재림군락이다. 그리고 해발고도 0m 해안에서부터 백록담 1950m 정상까지 100m 단위별로 나타나는 우선순위 식물군락을 차례대로 들여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드러난다.

 

<199117개 식물군락의 100m 고도별 분포면적>

 

임양재 등(1991), 「한라산의 식생」, 중앙대학교출판부, p199 인용
임양재 등(1991), 「한라산의 식생」, 중앙대학교출판부, p199 인용

그 첫 번째로 해발고도 0~100m 지역을 본다. 이 지역의 지형은 울퉁불퉁한 해안의 바위와 바닷물, 해안 절벽, 해안을 벗어난 저지대 평평한 지형을 이룬다. 기후는 아열대성 및 난대성 기후를 보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고 겨울철 북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해안 저지대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향수가 많다. 해안을 끼고 저지대에는 예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주거공간, 도로 등 마을이 형성되고 도시화가 잇따랐다. 다른 지방을 잇는 해상 교통의 역할을 하는 항포구도 곳곳에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많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식물은 쫓겨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식물 공간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그래서 이 지역의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경작지다. 경작지가 이 지역에서는 17개 식물군락 면적 중에 57.33%를 차지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먹고살아야 하는 식량을 얻기 위해 많은 농경지가 필요했다. 이 지역은 제주인들이 문명을 쌓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농경지를 경작하기 위해서는 잡초와도 전쟁이 불가피하다. 이곳은 사람과 식물 간의 치열한 전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식물들도 사람들의 공격에 순수히 물러서지 않았다. 강력히 저항한다. 경작지 공간을 중심으로 잡초를 선발대로 내보낸다. 농경지에 침입해 영양분을 가로채고 농작물의 생육을 훼방한다. 도심지 길가나 공원 등지 등 흙의 공간만 있으면 잡초를 보내 공격한다. 잡초는 이런 환경에 무장된 전투병이다. 사람들은 잡초를 몰살시키기 위해 화학 독성물질을 만들어 공격하지만, 잡초는 그런 물질을 이겨내는 방어기술까지 터득하며 대항한다.

그렇다고 사람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농경지 잡초와의 전쟁을 불사한다. 그때 잡초는 머리를 쓴다. 발아 시기를 들쭉날쭉하게 맞춘다. 종류별로 휴면기를 조절한다. 한꺼번에 발아해 몰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일부 잡초들은 덩굴 가시로 방어하기도 하고 독성을 품기도 한다. 사람의 똑똑한 두뇌로 아무리 잡초를 없애려 해도 잡초를 전멸시킬 수 없다. 그렇게 잡초는 지금도 사람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시작은 사람이 농사를 지었던 원시시대부터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 지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식물은 억새군락을 포함한 건성 초지 군락이다. 16.39%의 면적을 차지한다. 농경지를 벗어난 공간 상당수를 점령하고 있다. 화산재로 형성된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식물이다. 억새 밑동은 서로 뭉쳐 강력한 협동력을 과시한다.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쉽게 꺾이지 않는 유연성으로 맞대응한다. 날카로운 톱니처럼 돋아난 날카로운 잎은 누구든지 함부로 침범하는 것을 막는 방어력이다. 억새꽃으로 가을 들녘을 은물결로 수놓을 때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하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에 의해 초토화된 들판을 중심으로 곰솔, 삼나무, 편백 등을 집단으로 심은 곰솔·식재림군락이다. 이 지역의 17개 군락의 10.60%의 면적을 차지한다. 구릉지나 오름 능선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식재림군락은 강력한 집단 방어선으로 다른 식물의 침범을 차단하고 있다.

한영조 제주숲치유연구센터 대표/산림치유지도사
한영조 제주숲치유연구센터 대표/산림치유지도사

○ 필자 소개

필자는 1959년 제주시 월평동에서 태어나 제주의 숲과 오름을 사랑하는 제주 토박이다. 제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한때는 제주일보 편집부장, 제주경실련 사무처장과 공동대표를 맡아 제주 현안과 맞서기도 했다. 시인이면서 산림치유지도사를 취득한 후에 ‘제주숲치유연구센터’를 설립해 숲의 치유력을 탐하고 있다. 201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제주사회복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